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쓰라-태프트 밀약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1905년]] [[7월 29일]], [[미국]]의 제26대 [[미국 대통령|대통령]] [[시어도어 루스벨트]]의 특사인 [[육군부|미국 전쟁부]](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) 장관 [[윌리엄 하워드 태프트]][* 훗날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.]와 [[일본 제국]]의 총리 [[가쓰라 다로]]가 [[도쿄]]에서 은밀하게 맺은 협정. 실제 회담이 열린 날짜는 [[7월 27일]]이고, 회담 내용을 담은 각서(memorandum)상의 날짜가 7월 29일이다. 당시 태프트는 전쟁부 업무로 필리핀에 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들러 이 협약을 맺었다. 이 밀약의 목적은 [[일제강점기|일본 제국의 한국 식민 지배]]와 [[필리핀 제도 도민정부|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]]라는 양국의 이해 관계에 대한 상호 확인이었다. 일단 ‘형식상’으로는 외교 회담 또는 각서 수준에 그치므로, 제3국과의 조약시 상호간 승인을 거쳐야 하는 [[한일의정서]]에 어긋나지 않는다. 이 기록에 따른다면 새로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, [[아시아]] 지역에서의 이익 관계를 주제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 관한 각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. 따라서 그 형식에 주목하여 가쓰라 - 태프트 비망록, 가쓰라 태프트 비 각서라고도 불린다. [[밀약]]인 만큼, 상당 기간 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미국 [[역사학자]] 타일러 데네트(Tyler Dennett : 1883년 ~ 1949년)에 의해 [[1924년]]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.[* President Roosevelt's Secret Pact with Japan, Tyler Dennett, The Current History Magazine, October, 1924년] 이 밀약으로 인해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, 협상국 일원으로서 일본이 1921년 [[워싱턴 회의]] 이전까지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. 하지만 러시아 견제를 이유로 일본의 팽창을 묵인한 미국은 [[태평양 전쟁]]으로 인해 수 많은 자국민들이 희생되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